제7장
한기가 엄습했다.
박희수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떨었다. 등 뒤에서 갑자기 지독하게 섬뜩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는 박희수에게 마치 저승사자의 부름과도 같았다.
박희수는 겁에 질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녀는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보고 싶지 않았고,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문은 바로 코앞에 있었다.
“철컥.” 그녀는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돌렸다. 미친 듯이 뛰쳐나가려는 바로 그 순간, 반듯한 그림자 두 개가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거구의 경호원 두 명이 무표정하게 그녀를 쏘아보며 문 앞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막아섰다. 그리고는 권총을 꺼내 그녀의 머리에 겨누었다.
박희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
이럴 필요까지 있나?
박희수는 풀이 죽어 고개를 돌렸다. 막 입을 열려던 순간, 코끝에 은은한 담배 향이 밴 남자의 양복 원단이 스쳤다.
남자가 갑자기 다가오자 박희수는 속수무책이었다. 나비 날개 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몸이 뒤로 기울어지자, 남자의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휘감았다.
남자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탈옥이라니, 장하네. 아주 잘 도망간다 이거지?”
박희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도망치다 현장에서 붙잡혔다는 공포가 온몸을 휩쓸었다. 그녀가 경악에 찬 눈으로 남자를 바라볼 때, 위층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아, 윤명주 씨가 쓰러졌어요!”
……
윤명주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박희수가 또다시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도준은 억지로 그녀를 끌고 병원까지 함께 갔다.
병실에서 윤명주는 박희수의 예상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깨어났다.
그녀는 병상에 몹시 쇠약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물기 어린 눈망울로 가련하고도 억울하게 이도준을 바라보며, 마치 초상이라도 난 듯 서럽게 울어댔다.
윤명주 역시 의사였기에, 그녀를 진료한 의사는 그녀의 절친인 강설아였다. 강설아는 옆에서 한술 더 떠 거들었다. “이 대표님, 명주가 어쩌다 이렇게 심하게 다쳤어요. 조금만 더 세게 쳤으면 명주는 영영 못 깨어날 뻔했다고요!”
마찬가지로 의사인 박희수는 어이가 없었다.
원래는 일말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도망치기 위해 윤명주를 기절시킨 것은 자신이었으니, 사과든 보상이든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한 줄기 죄책감마저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윤명주. 그녀에 대한 박희수의 인상은 5년 전과 똑같았다. 청순하고, 연약하고, 위선적이며, 내숭덩어리.
그녀는 그렇게 세게 치지 않았다. 박희수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윤명주가 먼저 말을 꺼냈다.
“박희수 씨, 저랑 무슨 원수라도 졌나요? 어떻게 이렇게 심하게 때릴 수가 있어요. 도준 씨, 뒷목이 너무 아프고 머리도 어지러워요. 저 그때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죽는 줄 알았다고?
박희수는 정말 기가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네가 때렸어?” 병실 안, 이도준이 고개를 돌려 싸늘한 얼굴로 박희수를 쳐다봤다.
“네, 제가 때렸어요.” 박희수는 옆에 서서 눈을 한번 흘기더니 큰 소리로 인정했다.
박희수가 인정하자 윤명주는 더욱 목청껏 울기 시작했다. 가슴을 부여잡고 두 눈이 새빨개진 채 말했다. “박희수 씨, 전 당신과 아무 원한도 없는데 왜 저한테 이러세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구타를 당해야 하죠?”
구타?
쏟아지는 죄명에 박희수는 정말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망치려고 기절시킨 건 자신의 잘못이 맞다. 하지만 말은 바로 해야지.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가, 죽을 뻔했다가, 이제는 구타? 이거 완전 자해 공갈 아닌가!
“사과해.” 이도준이 나직이 말했다.
박희수는 오늘 청순가련과 내숭의 진수를 제대로 목격했다.
“어지간한 자해 공갈단 아줌마보다 더하네.” 박희수가 중얼거렸다.
“뭐라고?”
박희수는 그를 차갑게 쏘아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 잘못이에요. 당신의 첫사랑을 다치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세게 때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다음엔 살살 때릴게요.”
“지금 불만 있다는 거야?” 이도준이 박희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니요. 아주 만족합니다. 불만 있어 봤자 소용도 없고요.”
“괜찮아요, 도준 씨. 희수 씨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사실 희수 씨가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전 이미 다 용서했어요.” 윤명주가 한없이 너그럽고 착한 사람인 양 힘없이 말했다.
“널 다치게 한 건 저 여자야. 당연히 너한테 사과해야지. 저 여자 편들 필요 없어.”
이 인간아, 대체 어느 귀로 저게 내 편드는 걸로 들리는 거야. 박희수는 속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너, 나 좀 따라나와.” 이도준이 묵직한 압박감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라면 나가지, 누가 무서워할 줄 알고.
이도준이 걸음을 옮기자 박희수가 바로 뒤따랐다.
“도준 씨, 저 아직 몸이 좀 안 좋은데, 여기 남아서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
“쯧.”
박희수는 짜증이 났다.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데요? 제가 봐 드릴까요? 이도준 씨가 무슨 신선이라도 돼요? 남는다고 불로장생 약이라도 만들어 준대요?” 옆에 선 남자의 눈빛이 자신을 꿰뚫을 것 같지만 않았어도, 박희수는 정말 몇 마디 더 쏘아붙이고 싶었다.
“너! 너…….” 윤명주는 분에 못 이겨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박희수가 한 말에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어 부들부들 떨며 눈을 부릅뜰 뿐이었다.
윤명주는 이도준과 박희수가 나가는 것을 보며, 원독에 찬 눈으로 박희수의 뒷모습을 악狠狠하게 쏘아보았다.
저 천박한 년!
“명주야, 방금 그 사람 박희수 맞지? 어떻게 돌아온 거야?” 아까 윤명주의 편을 들어주던 강설아가 물었다.
박희수는 과거 의대 시절, 단과대 전체가 인정하는 수석이었다. 얼굴도 예쁜 데다 교수님들의 총애를 받았고, 의학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 수많은 상을 휩쓸었으며, 따르는 남자도 셀 수 없었다. 그야말로 남들이 부러워하고 질투해도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럴수록 시기하는 사람도, 아니꼬워하는 사람도 많아지는 법. 강설아와 윤명주가 바로 그중 하나였다.
그러다 2학년 때, 모두가 앞날이 창창할 거라 여겼던 박희수가 갑자기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소문에 의하면 교수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는데, 교수 부인에게 현장을 들켰고, 학교 측에서 추문을 덮기 위해 당시 박희수를 퇴학 처리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학교 측에서 덮어 버렸고 박희수가 사라지면서 흐지부지되었지만,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은 항상 있었다.
박희수가 떠난 후, 청순하고 아름다운 외모에 집안까지 좋은 윤명주가 즉시 두각을 나타냈다.
“맞아, 그 여자야.” 윤명주가 이를 갈았다.
박희수를 처음 봤을 때, 그녀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여자가 정말로 돌아왔을 줄이야.
5년 동안 그녀는 줄곧 이도준의 곁을 지켰지만, 이도준은 단 한 번도 그녀와 결혼하자는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이 남자의 성격을 알기에 감히 먼저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몇 년 더 이도준 곁에 있다 보면 언젠가 이 남자가 자신과 결혼해 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기다림이 결실을 보기도 전에, 박희수 그 여자가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말 지긋지긋한 악연이었다!
“진짜 그 여자였구나. 명주야, 너 그거 알아? 며칠 전에 너희 흉부외과에 해외 유학파 출신 과장 한 명이 낙하산으로 왔잖아. 이름이Cynthia라고, 의학계 랭킹 1위에 Y국에서 엄청 유명하대. 의술이 신화급이라고들 하던데. 듣자 하니 중국 이름도 진 씨라던데. 혹시 박희수 아닐까…….”
“병원장님이 직접 모셔왔다는 그 사람 말이야?”
“응.”
이 소문은 이미 병원 전체에 파다했다. 병원장이 직접 모셔올 정도에, 젊은 나이에 바로 과장으로 직행하고, 병원장이 개인 사무실까지 마련해 준 인물이라면 절대 가짜일 리 없었다.
게다가 그 인물은 몹시 신비로워서, 아직 병원에서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윤명주가 코웃음을 쳤다. “설아야, 너 지금 농담해? Cynthia 중국 이름이 박 씨라는 이유로 박희수일지도 모른다고? 제정신이야? 어떻게 Cynthia가 그 악명 높고, 2학년도 못 마치고 퇴학당한 그 여자일 수가 있어?”
